광양 노농연합회의 조직과 활동
- Abstract
- 본 연구는 광양노농연합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1920년대 광양지역의 노농운동과 민족운동을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본고에서는 먼저 1920년대 광양지역의 사회ㆍ경제적 배경을 검토하고, 이어 광양소작인상조회와 광양노농연합회의 조직과 주도인물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리고 광양소작인상조회와 광양노농연합회의 농민과 노동자 권익 옹호 활동과 양 단체의 회원들이 전개한 사회주의단체 참여 활동 및 신간회 활동을 추적해보았다.
전라남도의 다른 군에 비해 인구와 경지면적이 적었던 광양지역은 소작인의 비율이 높았다. 게다가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부재지주가 많았다. 부재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지세를 징수하고, 함부로 소작권을 이동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다. 따라서 광양지역의 소작인들은 지주에 대한 불만이 심각하였다.
그런데 3・1운동의 결과로 획득한 ‘문화통치’의 공간 하에서,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고, 1921년 8월에 조선소작인상조회가 창립되었다. 이 단체들은 지회를 조직하고 소작인 등의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광양의 특수한 사정에 영향을 받아, 광양의 소작인인 鄭晋武와 金完根 등은 1923년 1월 광양소작인상조회를 조직하였다. 정진무가 1922년 말 서울에 가서 조선소작인상조회의 간부들을 만나고 그 취지서를 갖고 와 지역의 유지들과 협의한 후, 조선소작인상조회의 광양지회로서 광양소작인상조회가 설립되었다. 광양소작인상조회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共存共榮을 표방하고, 지주의 소작인들에 대한 공평한 분배와 소작인의 지주에 온건한 태도를 촉구하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상호부조’를 강조하는 단체였다.
광양소작인상조회의 정진무와 김완근은 외부의 후원을 얻기 위해, 1923년 2월 28일 순천농민대회에서 순천, 여수, 보성 등지의 농민운동지도자들과 南鮮農民聯盟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남선농민연맹회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전라남도 지방의 농민단체 조직 및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진무와 김완근 등은 광양지역에 소작인단체를 조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23년에 봉강소작인회, 옥곡소작인회, 세풍소작동맹회, 도월소작인회, 광양면소작인회, 다압소작인회, 옥룡소작인회 등이 창립되었고, 1924년 1월에는 골약소작인회 등이 조직되었다. 1923년 말 경 광양지역 소작인단체의 회원은 3,53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양소작인상조회는 회장제로 운영되었고, 회장 등의 임원진에는 지주와 친지주적인 인물이 다수 포진해 있어 소작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정진무 등의 소작인들은 1924년 2월 회의를 열어 광양소작인상조회의 운영체제를 하의상달식인 위원제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그 날 광양소작인상조회의 명칭을 광양소작인회연합회로 변경하였다.
광양소작인회연합회로 조직이 변경된 후, 지주와 지주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소작인들이 이탈함에 따라서 광양소작인연합회의 회세는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구성원이 동질화 되고, 운동 목표도 일치되었으므로, 광양소작인연합회의 결속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24년에 들어와 광양지역에는 노동회의 조직이 이어졌다. 1924년 2월 옥룡면에 옥룡노동친목회가 설립되었고, 1924년 3월 인덕면에 인덕노동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북성회계의 전라노농연맹회와 남선노농동맹의 도움을 받아, 1924년 3월 16일 鄭順和ㆍ정진무ㆍ김완근 등에 의해 광양노동회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1924년 4월 전국노농단체로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되었다. 이 때 광양지역의 대표적 노농운동가인 정진무는 조선노농총동맹의 발기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정진무는 조선노농총동맹의 방침에 따라 광양 내 노농단체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24년 5월 16일 광양소작인회연합회와 기타 15개 단체의 대표자와 함께 광양노농연합회를 창립하였다.
광양노농연합회는 계획의 심의ㆍ의결 및 평가ㆍ감사 기관으로 집행위원회를 두고, 실제적인 일을 추진하기 위해 상무집행위원회를 두었다. 상무집행위원회는 서무부ㆍ재무부ㆍ교육부ㆍ노동부ㆍ소작부의 5개 부서를 두었다. 이 기관을 주도한 인물은 정진무ㆍ김완근ㆍ정순화 등이었다.
광양소작인연합회와 광양노농연합회는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두 단체는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권 이동, 지세 징수, 무료 부역 등에 저항하여, 소작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양노농연합회는 지방의 군소노농단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광양노농연합회 주도인물들은 업무방해나 가택침입죄로 4월, 혹은 1년 등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광양노농연합회의 핵심 주도인물인 鄭晋武, 金完根, 鄭順和, 辛命俊 등은 북성회계의 남선농민연맹회, 전라노농연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의 조직과 운영에 참여하여 이 단체들의 지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또한 청년들의 참여를 제고하기 위하여 광양노농청년회와 광양청년연맹회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이들은 노농운동의 추진을 위하여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경 체포되어 1년 내지 2년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정진무, 김완근, 정순화 등은 1929년 신간회 광양지회를 조직하였다. 비록 신간회가 1931년 해체된 데 영향을 받아 광양지회도 오래 존속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통합적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양노농연합회는 소작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농민운동단체였다. 그렇지만 그 주도인물들이 사회주의계 노농단체와 사상단체 및 조선공산당, 그리고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에서, 이 단체는 민족의 해방을 지향하는 민족운동 단체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 Author(s)
- 서양민
- Issued Date
- 2009
- Awarded Date
- 2009-08
- Type
- Thesis
- Keyword
- 노농연합회
- URI
- http://dspace.hansung.ac.kr/handle/2024.oak/6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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