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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박원희의 여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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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고(本稿)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활동한 박원희(朴元熙)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본 연구이다. 본고의 목적은 박원희가 전개한 여성해방운동과 그녀의 여성해방사상을 고찰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식민지시기 여성문제를 민족해방 및 계급투쟁과 연계하여 해결하려고 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며, 아울러 그녀가 속한 서울파의 여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사상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박원희는 1898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의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 역할을 해 주던 오빠의 영향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와 그 부설 사범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였던 그녀는 3·1운동을 계기로 교사의 현실에 회의를 하였다. 1920년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오빠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활동을 보며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김사국(金思國)을 만나게 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고, 그와의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양복직공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노동자의 처지를 인식하고, 여성 문제의 해결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여성해방사상을 수용하였다.
일본에서 귀국 한 박원희는 1923년 3월, ‘여성의 반역’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고, 서울청년회에서 주최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곧 수배 중이었던 남편이 있는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간도 용정에 있는 동양학원의 영어강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자립심과 도전정신을 고취시키고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동양학원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엘렌 케이의 저작을 번역하는 등 여성해방사상의 내면화에 힘썼다. 불행히도 이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는데, 유산을 경험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가 이후 모성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기소유예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박원희는 지역 여성단체인 광진부인회(廣進婦人會)에 참여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녀는 1924년 5월에 조직된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의 발기인이자 집행위원으로, 경성여자청년회의 대표로, 1926년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의 중진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여러 여성단체의 주역으로 강연과 언론 기고 등을 통하여 여성해방사상의 선전과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의 요구에 따라 창립된 근우회와 신간회에 참여하여 민족해방운동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서울파의 비밀 사회주의 그룹인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고, 서울청년회의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박원희의 여성해방사상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처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조선의 여성들이 어떠한 법률적 권리가 없는 상태에서 가정에서는 생산의 도구로 취급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모성보호에 대한 시설이 없고, 무산계급여성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게다가 사회가 현모양처주의를 강조하여 여성들이 도구화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여성들의 지위가 이렇게 된 원인을 재래의 봉건적 사회와 자본주의 제도로 인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따라 모성보호와 남녀의 평등, 부인의 독립과 자유가 보장되고, 실현되는 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다.
박원희는 여성해방이 자본주의제도에서는 불가능하고, 이를 사회주의제도로 변화시킬 때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자본주의제도가 가져온 형식상의 자유는 인정하였지만, 무산계급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자본주의체제 하의 민족주의 여성운동으로는 여성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녀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무산계급해방과 함께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원희는 1926년 남편 김사국과 사별하였으며, 1년 6개월 후인 1928년 1월 5일, 병고를 떨쳐내지 못한 채 어린 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죽는 순간 동지들에게 유지를 부탁할 정도로 그녀는 최후까지도 여성해방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Author(s)
안미경
Issued Date
2011
Awarded Date
2011-07
Type
Thesis
Keyword
박원희여성해방사상여성해방운동조선여성동우회경성여자청년회모성보호서울청년회중앙여자청년동맹근우회
URI
http://dspace.hansung.ac.kr/handle/2024.oak/6013
Affiliation
한성대학교 대학원
Advisor
조규태
Degree
Master
Publisher
한성대학교 대학원
Appears in Collections:
사학과 > 1. 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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