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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택지와 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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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 연구에서는 조선 국왕의 권위와 통치력의 변화과정을 왕릉의 擇地와 山論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조선왕릉의 조영은 새로 즉위한 국왕이 가장 먼저 수행하는 과제였다. 특히 왕릉의 조영과정과 절차는 예제에 따라 진행되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왕릉의 조영을 예제에 따라 행한 것은 왕릉조영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통치자로서의 정통성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을 조영하는 모든 과정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왕릉을 조영하기 위한 택지의 선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진중한 과정을 거쳐서 결정 하였다. 왕릉택지를 선정하는 과정 중에는 풍수적 측면에서 吉凶여부를 검증 받아야 했다. 이때 국왕의 장지 후보지에 대한 논의는 지관들이 올려 보낸 ‘山論’을 가지고 하였다. 산론이란 지관들이 산을 둘러본 후 풍수적인 측면에서 길흉을 검토한 보고서이다. 국왕과 총호사 등은 산릉도감에서 보고 받은 여러 곳의 산론을 놓고 우열을 가리면서 葬地를 결정 하였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왕릉을 조영할 때 이와 같은 과정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승하한 후 5일이 지나서 성복을 하였다. 성복을 하기 전 까지는 선왕의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사실은 성복하기까지 5일 동안 새로운 국왕의 즉위와 국왕의 장례를 준비 하였다. 성복을 마친 후 보위에 오른 국왕은 선왕의 국상을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 ․ 빈전도감 ․ 산릉도감 등을 구성하고 조직을 이끌어 갈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이때 삼도감을 지휘하는 총 책임자는 총호사라 하였고, 각 도감의 우두머리는 제조라고 하였다. 총호사는 주로 우의정이 임명되었고, 각각의 제조는 국장 임무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자들로 구성 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조직은 국상 기간 동안만 유지되었으며, 총호사를 비롯한 각 제조들은 국상기간 중 몇 차례 任免되었다.
총호사와 산릉도감에서는 국상에 쓰일 葬地를 찾기 위한 조직(看審團)을 구성하였다. 왕릉의 장지로 사용하기 위한 山을 풍수적으로 평가하는 행위를 看審(또는 看山)이라고 하였다. 이때 간심업무에 종사하는 구성원을 地官또는 地師라 하였고, 그들 중 우두머리를 相地官이라고 하였다. 상지관은 관상감에 소속된 관원이었으며, 상지관을 비롯하여 간심에 참여하는 집단을 看審團이라고 하였다. 간심단은 산릉도감에 소속된 관원 신분의 지사와 方外地師로 구성되었다. 간심단에 소속된 방외지사는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을 인정받아 추천에 의해 합류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직에 있지 않아 職名이 없기 때문에 임으로 軍職을 부쳐주어 국가의 일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간심단은 총호사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왕릉의 장지로 쓰일 후보지를 간심하였다. 간심 대상지는 당초 봉표를 해 둔 곳과 여러 관계자들이 추천으로 선택된 곳들이었다. 이때 간심 대상지로 선택된 곳은 사대부들의 무덤이 있는 곳과 기존에 조영된 왕릉의 주변 산줄기, 그리고 민가가 있는 곳과 무덤이 조영되지 않은 새로운 곳 이었다. 그런데 간심 대상지는 왕대별로 또는 시대별로 달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본고에서는 간심대상지가 달라지는 원인과 이유 등을 국왕의 권위와 연계하여 검토해 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본고에서는 첫째, 조선왕릉의 택지를 결정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당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地理에 대한 인식과 개념을 살펴보았다. 둘째, 조선후기 왕릉택지는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이유로 결정 되었는지, 그리고 기간은 얼마나 걸렸는지 등에 대한 흐름을 살펴보았다. 연구 자료는 연대기 자료와 『산릉도감의궤』등 문헌 자료와 현존하는 왕릉을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문헌자료와 실존하는 현장의 상황을 비교 검토해 가면서 지리에 대한 인식을 검토했다. 이때 천장된 왕릉과 舊壙이 있었던 곳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도 穿鑿하였다. 셋째, 조선후기에 왕릉을 택지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山論을 분석하였다. 왕릉택지과정에서 작성된 산론은 국왕을 비롯하여 총호사 등이 기본적으로 참조했던 1차 자료였다. 이때 간심단의 지관들이 작성한 산론은 어떤 풍수론을 적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산론의 작성 형식과 구성은 시대적으로 또는 왕대별로 어떻게 변화해 나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호 비교를 해 보겠다.
이상과 같은 검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첫째 왕릉 택지를 결정할 때 당대인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둘째 산론의 내용을 통하여 조선후기에 펼쳐진 풍수의 내용과 인식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이다. 본 연구는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 우선 왕릉의 택지는 국왕이 승하한 후 대략 1개월 동안 발생한 일들이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왕릉 택지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못했다. 그리고 산론에 등장하는 풍수론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당시 지관들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였다고는 볼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서 왕릉 택지의 시사점을 구체화시키지 못했다. 또 모든 왕릉의 의궤에 있는 산론을 살펴보지 못한 것은 산론에 대한 논쟁의 경향성을 파악하는데 한계를 나타냈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은 앞으로 계속된 연구에서 보완하겠다.
Author(s)
이덕형
Issued Date
2013
Awarded Date
2013-08
Type
Thesis
Keyword
조선왕릉왕릉택지택지왕릉 입지산론풍수지리
URI
http://dspace.hansung.ac.kr/handle/2024.oak/8410
Affiliation
한성대학교 대학원
Advisor
정호섭
Degree
Doctor
Publisher
한성대학교 대학원
Appears in Collections:
사학과 > 1. 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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