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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등선(羽化登仙), 나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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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된 것이 기뻤고, 흔쾌히 스스로 나비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장주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 깨어나자 틀림없이 다시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분별이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사물의 탈바꿈(物化)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얘기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를 차운(次韻)했고, 예술가들이 인용했으며, 철학적 종교적으로 확대되었다.

장자의 꿈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가 보다. 산인지 바다인지 모를 출렁임 위로 마치 백색의 꽃잎과도 같은 나비가 떠올랐다. 나비가 날개짓을 했던가, 푸른색의 출렁임 속에서 마치 영기(靈氣)라도 되는 듯 일군의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푸른색의 출렁임, 꿈속의 움직임들은 파도였다. 파고는 높았으나 움직임은 둔중했다.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파도도 있는 모양이었다. 서로 밀고 당기는 태극의 운동인지도 몰랐다. 파도와 파도의 틈바구니로 피어오른 움직임들이 나비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영기의 끝자락이 꿈틀거리며 애벌레로 변하는 듯했다. 애벌레들이 또 여기저기 산란을 하였을까. 점점이 흩어져 알이 되었다가 애벌레로 모였다가 혹은 고치로 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파도는 어디서 생겨났으며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은 또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처음에 보였던 하얀 나비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하는 중이었다. 하얀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따라 움직였다. 파도가 움직일 때마다 영기의 애벌레들이 생성되었다. 이내 나비는 하얀 꽃잎이 되었다가 다시 나비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파란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아마도 허공의 어딘가에서 흩뿌려졌을 무지개의 색들을 덧입기도 했다. 나비는 파도였고 나비는 꽃잎이었으며 아니, 나비는 바다였다.

시공을 넘나드는 순간, 어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기억이지만, 뚜렷하게 남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하얀 나비의 날갯짓, 불현듯 한 낱말이 떠올랐다. 우화등선(羽化登仙), 왜 이 낱말이 떠올랐을까. 장자의 호접몽에 비추어 보니 딱히 뜬금없는 것은 아니겠으되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처럼 툭 내던져진 것일지 몰랐다. 아마도 심중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던 알 수 없던 그 울렁임, 딱히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횡격막 어딘가 마치 꿈속의 파도처럼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던 그것들. 유년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아, 차마 얘기하고 싶지 않은 시공의 그가 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렀으니 비로소 꽃이, 아니 나비가 된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붓을 들었다. 밑그림도 구도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현몽처럼 내게 이른 울렁임을 잡아두어야겠다는 생각만 또렷하였다.

이런저런 나비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비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비의 실물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나비는 이내 어떤 숲속으로 날아들었다. 숲속의 나무들은 모두 발가벗고 있었다. 어쩌면 파도가 변하여 숲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무들은 큰 가지에서 작은 가지로 다시 실핏줄 같은 가지로 옮겨 다니며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잎과 잎들이 겹치고 가지와 가지들이 겹쳐도 서로를 가리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나무는 나무이되 파도와 같았고 무수한 잎들의 겹침인데도 하나의 잎처럼 보였다. 실핏줄 같은 가지들이 뿜어내는 호흡과 둥그런 잎들이 받아내는 호흡들이 마치 들숨 날숨의 울렁임 같았다.

신화의 세계가 이러한 것일까? 너무도 투명하여 서로를 비춰볼 수 있는 세계 말이다. 어쩌면 숨길 것도 숨길 필요도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명암도 원근도 크게 필요치 않았다. 투명한 숲에 기운이 들면 파도의 틈바구니에서 애벌레의 영기가 자라듯 나무는 애벌레와 애벌레의 알들과 고치들을 가지의 여기저기 매달아두었다. 투명의 숲속에 든 나비들도 모두 투명하였다. 숨기지 않은 마음들이 천천히 움직이면 또 천천히 색들이 변하였다. 나비의 날갯짓에 의해 파도가 움직이고 애벌레들이 꿈틀거리며 오르듯이 나무와 가지와 잎과 숲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색을 입기도 하고 희노애락의 색을 입기도 했다.

투명의 숲에 든 나의 나비는 이윽고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작은 잎과 큰 잎들이 겹치고 작은 가지와 큰 가지가 겹치는 숲속으로 나비가 날아간 길이 보였다. 숲은 오로지 투명하여 사라진 뒷모습조차 또렷하였다. 생시와 꿈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 듯,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도 그런 것일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사라진 나의 나비는 이윽고 어떤 기운으로 화하여 돌아오곤 했다. 알과 애벌레와 성충과 꼬치들이 얽히고설켜 나비가 되었다. 어떤 나비들은 잎이 되기도 하고 가지가 되기도 했다. 나비와 꽃은 구분되지 않으며 나비와 잎도 구분되지 않았다. 잎과 잎이 겹치고 가지와 가지가 겹쳐도 어느 하나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움직임들이, 느린 파도와 같은 울렁임들이 서로 기대어 애무해줄 뿐이었다. 나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숲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여 심지어 이런저런 마음이 들고 나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화의 숲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일 것이었다.

작업에 몰두하다가 지난날의 꿈을 떠올렸다. 아무 의미도 없이 아무 조건도 없이 그저 무심한 태도로 내던져진 말 우화등선, 툭 던져진 한마디가 심중에 남아 나를 신화의 숲으로 이끌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나비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 어쩌면 지난날의 꿈과 작업이 모두 우화등선에 이르는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깨에 날개를 달고 신화의 숲으로 날아가는 꿈, 그 나비를 위해 다시 붓을 잡는다. 아니 그 나비가 되기 위해 붓을 잡는다. 졸린 눈꺼풀 사이로 파도와 숲과 나무들의 울렁임이 보이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숲으로 날아간다. 우화등선, 비로소 나는 나비가 된다.
Author(s)
김채원
Issued Date
2024
Awarded Date
2024-02
Type
Thesis
URI
http://dspace.hansung.ac.kr/handle/2024.oak/8047
Affiliation
한성대학교 대학원
Advisor
김선태
Degree
Master
Publisher
한성대학교 대학원
Appears in Collections:
회화과 > 1. 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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